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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사람들이 에어컨을 거부해 온 건 단순히 날씨가 서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에어컨은 미국식 과소비"라는 문화적 자존심에 가까운 정서가 대륙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죠. 그런데 올 6월, 프랑스 남서부에서 기온이 44.3도까지 치솟고 스페인에서 나흘 만에 200명 넘는 사망자가 나오면서 그 공식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오전 내내 목공 작업실에서 대패를 밀다가 스마트폰으로 이 뉴스를 접한 순간, 손끝이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프라 붕괴: 낭만이라고 불렀던 것들이 현실에 부딪히다
저는 주말마다 교외 작업실에 내려가서 느티나무나 단풍나무 통원목 슬래브를 직접 손으로 나르고 대형 전기 대패로 깎아내는 취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고풍스러운 원목이라도 내부 결함이 있으면 팽창 장력을 버티지 못하고 쩌적 갈라진다는 걸 몸으로 압니다. 이번 유럽 폭염 사태를 보면서 정확히 그 감각이 떠올랐습니다.
유럽연합(EU) 전체 건물의 85% 이상이 2001년 이전에 지어진 노후 구조물입니다. 열저항성(Thermal Resistance), 즉 외부 열기가 실내로 침투하는 속도를 늦추는 단열 성능이 현대 기후 기준과 동떨어진 건축물들이 대부분입니다. 여기서 열저항성이란 건물 외벽이 외부 온도 변화를 얼마나 오래 차단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단열 지표로, 수치가 낮을수록 폭염이나 혹한에 실내 온도가 빠르게 따라 올라가거나 내려갑니다. EU 건물 재고의 절대다수가 이 수치를 충족하지 못한 채 수십 년을 버텨온 것입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독일에서는 지열에 팽창한 아스팔트가 쩍쩍 갈라지며 아우토반 주요 구간이 통제됐고,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는 원자력 발전소의 냉각수 과열로 가동이 일시 중단됐습니다. 냉각수란 원자로 내부의 열을 외부로 빼내는 액체 순환 시스템으로, 하천이나 저수지에서 끌어온 물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폭염으로 하천 수온 자체가 높아지면 냉각 효율이 급락해 원전 출력을 강제로 낮출 수밖에 없게 됩니다. 교실 온도가 40도까지 오르며 교사들이 수업 중 쓰러졌고, 프랑스 6,700만 인구 중 4,400만 명에게 폭염 적색경보가 내려졌습니다(출처: 로이터).
제가 예전부터 유럽의 냉방 문화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서늘한 기후, 높은 전기세, 친환경 정서가 맞물려 있으니 에어컨 보급률이 쉽게 오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관이 꽤 단단했거든요. 파리처럼 역사적 건축물이 많은 도시는 외관 보존을 이유로 실외기 설치 자체를 금지한 구역도 있었고, EU 산업용 전기 평균 단가가 미국의 2.5배에 달하는 구조에서 냉방비 부담은 서민 가계에 실질적인 장벽이었습니다.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저는 오랫동안 봐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참사 앞에서 그 판단이 완전히 흔들렸습니다.
44.3도가 바꾼 에어컨 모멘트, 아시아 기업이 빠르게 채웠다
유럽의 에어컨 보급률은 국제에너지기구(IEA) 기준으로 약 20%에 불과합니다. 미국이나 일본이 90% 안팎인 점과 비교하면 격차가 상당합니다. 그런데 이 수치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주택 에어컨 보급률은 2023년 18%에서 2025년 24%로 올랐고, 독일의 에어컨 생산량은 2019년 18만 1,000대에서 2024년 31만 7,000대로 5년 새 75% 급증했습니다(출처: 국제에너지기구 IEA).
이 수요 공백을 가장 빠르게 채운 건 아시아 제조사들이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데이터를 직접 엑셀에 정리하면서 숫자가 꽤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는데, 항목별로 보면 이렇습니다.
- 삼성전자: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등 주요 시장에서 2025년 상반기 두 자릿수 판매 성장률 기록
- LG전자: 국내 생산라인 4월부터 풀가동 전환
- 중국 메이디그룹: 독일 온라인 판매 전년 대비 37% 증가, 스페인·프랑스 출하량 각각 108% 폭증
- 일본 미쓰비시전기: 프랑스·스페인·영국·독일 중심으로 판매 확대
솔직히 이 수치를 처음 봤을 때 "와, 콧대 높던 유럽이 생존의 청구서 앞에서 규제를 통째로 찢어버리는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목공 작업할 때 아무리 오래된 명품 가구라도 내부 구조가 버티지 못하면 결국 최첨단 접합 부품을 외부에서 수입해 박아 넣을 수밖에 없는 현실과 정확히 같은 구도였습니다.
주식시장에서도 냉방 관련 종목들의 밸류에이션(Valuation) 재평가가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여기서 밸류에이션이란 기업의 현재 주가가 그 기업의 실제 이익 창출 능력 대비 적정한지를 따지는 가치 평가 지표입니다. 미국 캐리어글로벌 시가총액이 연초 대비 22.5% 늘었고, 일본 다이킨공업 주가도 17% 상승했습니다. 미즈호증권은 극심한 폭염이 노후 냉방 장비의 교체 주기(Replacement Cycle)를 앞당긴다는 분석을 내놓았는데, 교체 주기란 제품이 수명을 다해 새 제품으로 바꾸는 시점을 말합니다. 이 주기가 짧아질수록 제조사 입장에서는 수요가 구조적으로 앞당겨지는 효과가 생깁니다.
반사이익 뒤에 남은 구조적 과제, 어떻게 읽어야 하나(냉방패권)
이번 유럽 에어컨 모멘트를 두고 저는 한 가지 불편한 지점을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럽이 "친환경"과 "전통 건축 미관 보존"이라는 프레임 뒤에 숨어 에어컨 보급을 20%대로 억눌러온 결과, 매해 수백 명의 취약계층 노인과 노동자들이 온열질환으로 사망해 왔습니다. 환경을 지킨다는 명분이 정작 가장 더위에 취약한 계층에게 가장 가혹한 피해를 전가해 온 구조적 모순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유럽식 환경 담론이 직면한 가장 냉혹한 자기 모순이라고 봅니다.
물론 에어컨 보급 확대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전문가들은 냉방 수요 자체를 줄이는 건물 에너지 효율 개보수(Retrofit)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레트로핏이란 기존 건축물의 단열재를 교체하고 창호 성능을 높여 외부 열 침투를 줄이는 리모델링 방식으로, 에어컨 없이도 실내 온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근본 해법에 가깝습니다. EU 건물 85% 이상이 노후 구조물인 상황에서 레트로핏 특별 기금 편성은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과제가 아닙니다.
우리 입장에서도 단순히 삼성전자, LG전자의 수주 호조라는 단기 반사이익 지표에만 취해 있을 때가 아닙니다. 유럽의 노후 에너지망 붕괴가 글로벌 원자재 공급망과 환율 변동에 어떤 연쇄 파장을 만들어낼지, 하반기 데이터를 꼼꼼하게 추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작업실에서 슬래브 상판의 수평을 맞출 때 늘 생각하는 것처럼, 한 곳의 결함이 전체 구조의 수평을 흔든다는 사실은 목공이든 글로벌 공급망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금융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투자 결정은 반드시 전문가 상담을 통해 신중하게 판단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