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근길에 잠깐 들른 동네 홈플러스가 그렇게 낯설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습니다. 신선식품 매대는 듬성듬성 비어 있었고, 수입 식자재 코너는 PB(자체 브랜드) 상품들로만 간신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엔 '물량 보충이 늦나 보다'라고 넘겼는데, 알고 보니 협력 납품업체들이 2,000억 원 규모의 미수금을 이유로 납품 자체를 끊은 결과였습니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대형 유통 공룡이 이런 모습으로 마주쳐올 줄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텅 빈 매대가 보여준 자금난의 실체
홈플러스는 현재 기업회생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기업회생절차란 법원의 관리하에 부채를 조정하고 사업을 지속하면서 회사를 살려내는 법적 구조 조정 절차로, 흔히 '법정관리'라고도 불립니다. 쉽게 말해 스스로 빚을 갚을 능력을 잃었을 때 법원이 중간에 들어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를 조율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홈플러스가 선택한 첫 번째 수는 기업형 슈퍼마켓(SSM) 부문인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를 하림그룹 계열사 NS홈쇼핑에 매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알짜 자산부터 먼저 떼어낸 셈인데, 이걸로 확보할 수 있는 자금이 약 1,200억 원이지만 잔금 정산까지 두 달가량이 걸려 실제로 손에 쥔 돈은 아직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홈플러스는 최대 채권자인 메리츠금융그룹에 브릿지론을 요청했습니다. 브릿지론(Bridge Loan)이란 장기 자금이 들어오기 전까지 일시적인 유동성을 메우기 위한 단기 긴급 대출을 의미합니다. 대규모 자산 매각이나 구조 조정 중인 기업이 자금 공백을 버티기 위해 활용하는 수단인데, 문제는 메리츠가 요구하는 조건이 MBK파트너스와 김병주 회장의 연대 보증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직접 그 매장 안을 걸어보면서 느낀 건 이 숫자들이 단순한 재무제표 위의 수치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5월 급여일에 4월 급여 일부만 지급됐다는 사실, 그리고 어두운 표정으로 텅 빈 매대 옆에 서 계시던 직원분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국내 유통 산업의 고용 규모를 감안하면, 홈플러스 임직원 약 1만 7,000명의 생계는 단순히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닙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유통업 종사자 1인의 실직은 관련 협력업체와 지역 상권에 평균 2~3명분의 간접 고용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출처: 산업연구원).
이번 자금난의 핵심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협력업체 납품 중단으로 인한 매대 공백 확대
- 두 달째 지연된 직원 급여 일부 지급
- 브릿지론 협상 난항으로 운영 자금 공백 지속
- 익스프레스 매각 대금 1,200억 원의 실제 유입까지 두 달 이상 소요
오너 책임 회피와 신기루 같은 '3위 도약' 논리
홈플러스는 이제 본사와 대형마트, 온라인몰을 포함한 잔존사업부문 전체를 매물로 내놨습니다. 매각 주관사인 삼일회계법인이 잠재 인수 후보들에게 티저(Teaser)를 발송한 상태입니다. 티저란 인수합병(M&A) 과정에서 매수 후보자에게 기업 개요와 핵심 정보를 담아 보내는 초기 안내 문서로, 본격적인 입찰 참여를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홈플러스 측은 대형마트를 보유하지 않은 제3의 기업이 인수하면 단숨에 국내 대형마트 3위 사업자로 도약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익스프레스를 제외한 대형마트·온라인몰 매출이 연간 5조 8,000억 원대라는 숫자를 근거로 제시하면서요. 이걸 매력적인 기회라고 보는 시각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봐야 합니다. 이미 알짜 자산인 익스프레스는 빠져나갔고, 남아 있는 건 의무휴업일 규제에 묶인 오프라인 대형마트들입니다. 쿠팡, 이마트, 롯데마트, GS리테일 등 유통 대기업 모두가 선을 긋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수·합병(M&A)에서 '3위 도약'이라는 타이틀이 실질적인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숫자에 불과합니다.
부동산 가치 산정 문제도 걸림돌입니다. 홈플러스는 보유 부동산을 약 4조 8,000억 원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메리츠금융그룹은 담보로 잡은 62개 점포 가치가 1조 5,000억 원 수준이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양측의 자산가치 평가가 3분의 1 수준으로 엇갈리는 상황에서 인수 협상이 순조로울 리 없습니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기업 구조 조정 관련 통계에 따르면, 자산가치 평가 격차가 클수록 M&A 성사율이 현저히 낮아지는 경향이 확인됩니다(출처: 금융감독원).
저는 메리츠가 연대 보증 조건으로 MBK파트너스와 김병주 회장을 콕 집어 요구하는 이유가 사실 당연하다고 봅니다. 관리인을 맡은 전문 경영인이 개인 보증까지 내놓겠다고 했음에도 실질적인 대주주는 뒤로 빠져 있다면, 이건 책임 경영의 기본 원칙이 무너진 것입니다. 사모펀드가 기업을 인수해 배당과 자산 매각으로 수익을 회수한 뒤, 정작 회사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책임은 회피하는 구조는 이번 홈플러스 사태에서 매우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부분만큼은 두 시각이 있다는 점도 알지만, 1만 7,000명의 임직원을 앞에 두고 오너가 보증 한 장 서지 않겠다는 건 어떤 논리로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법원이 정한 회생계획 인가 시한이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 매각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홈플러스는 청산 또는 공중분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맞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통 업계를 지켜보는 입장에서, 이 상황이 단순히 한 기업의 실패로 마무리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매대가 텅 빈 마트를 나오면서 든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이 공간이 어떻게 마무리되든, 그 안에서 일했던 분들의 생계만큼은 어떤 방식으로든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홈플러스의 회생 가능성을 낙관하기 어려운 지금, 정부와 법원이 고용 안전망 문제를 매각 협상 못지않게 중요하게 다뤄야 할 시점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투자·법률 조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