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출이 역대급으로 잘되고 있는데, 왜 원화 가치는 17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을까요? 저도 어젯밤 모니터 앞에서 1,517원이라는 숫자를 보고 잠깐 손이 멈췄습니다. 코스피는 8,000을 돌파했는데 달러 환전 비용은 금융위기 수준이라는 이 기묘한 불일치, 저만 이상하게 느낀 게 아닐 겁니다.
무역 흑자인데 환율이 오른다고?
올해 1분기 경상수지(수출입·해외 투자 배당·이자·관광·운송 등 외국과 돈을 주고받은 모든 결과)가 737억 달러, 우리 돈으로 112조 원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경상수지란 쉽게 말해 우리나라가 해외와 벌인 모든 경제 거래에서 얼마를 벌었는지 보여주는 성적표입니다. AI 반도체 수출 호황이 이 숫자를 3년 전의 3.8배 수준으로 끌어올렸죠.
그런데 원달러 환율은 6거래일 연속 1,500원을 넘겼습니다.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2년을 통틀어 1,500원대 마감이 14거래일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18거래일을 넘어섰습니다. 국제결제은행(BIS) 집계 기준 4월 원화의 실질 구매력은 64개국 중 63위였습니다. 구매력이란 같은 금액으로 실제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을 의미하는데, 우리보다 낮은 나라는 일본뿐이었습니다(출처: 국제결제은행).
전통적으로 무역 흑자가 나면 원화 가치가 오르고 환율이 내려가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전문가들은 이제 무역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이 이동하는 흐름', 즉 금융계정을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금융계정이란 한국인이 해외에 투자한 돈과 외국인이 한국에 투자한 돈의 차이를 나타내는 항목으로, 이 수치가 클수록 국내 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올해 1분기 금융계정 순자산 유출은 654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와 거의 맞먹는 규모의 달러가 투자 명목으로 해외로 나간 것입니다.
달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구조
왜 이렇게 달러가 해외로 나가고 있을까요? 제가 직접 포트폴리오 리밸런싱 작업을 하면서 체감한 부분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자와 개인 서학개미들이 미국 주식·채권 매입을 꾸준히 늘리고 있고, 대기업들도 미국 공장 건설이나 해외 인수합병에 달러를 쏟아붓고 있습니다. 달러를 벌어오는 속도만큼, 아니 그 이상의 속도로 달러가 해외로 재투자되고 있는 겁니다.
반대 방향에서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차익 실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달 초부터 12거래일 연속 코스피에서 순매도를 기록했고, 팔아치운 금액만 46조 원이 넘습니다. 올해 누적으로는 93조 원으로, 1년 전 같은 기간의 6.7배 수준입니다. 이들이 한국 주식을 팔아 원화로 받은 돈을 다시 달러로 바꿔 해외로 가져가면서 시장의 달러 수요가 폭증하는 구조입니다.
고환율을 만든 주요 원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서학개미와 기관의 해외 주식·채권 투자 급증
- 대기업의 해외 공장 건설 및 인수합병(M&A) 달러 지출
- 외국인 투자자의 코스피 차익 실현 후 달러 환전
- 중동 전쟁 장기화에 따른 국제 유가 상승과 원유 수입 달러 수요 증가
- 미국 기준금리 인상 우려에 따른 글로벌 달러 선호 심화
NDF 시장이라는 복병
환율을 밀어올리는 요인 중 일반인에게 가장 낯선 것이 역외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입니다. NDF란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해외 금융시장에서 실제 원화를 주고받지 않고, 향후 환율 변동폭만큼 차익을 정산하는 방식으로 원화의 방향에 베팅하는 파생상품 시장입니다. 실제 원화가 필요해서 거래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환율이 오를까 내릴까'를 맞히는 투기적 베팅이라고 보면 됩니다.
현재 미국 기준금리(3.5~3.75%)가 한국(2.5%)보다 높은 상황이 지속되면서 NDF 시장에서는 원화 하락에 베팅하는 포지션이 쌓이고 있습니다. 이 베팅이 한쪽 방향으로 몰리면 실제 서울 외환시장의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리는 영향을 미칩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이 현상을 두고 "꼬리(NDF 시장)가 몸통(서울 외환시장)을 흔든다"고 표현할 정도로, 해외 투기 자금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문제입니다. 거시 지표가 아무리 건전해 보여도, 투기 세력이 원화 약세 방향으로 포지션을 잡으면 실제 환율이 그쪽으로 끌려가는 취약한 구조가 지금의 한국 외환시장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한국 GDP 대비 외환시장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 보니, 해외 NDF 자금이 이처럼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성공의 비용"이라는 말,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정부 일각에서는 지금의 고환율을 "한국 경제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공의 비용"이라고 말합니다. 국가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CDS 프리미엄(신용부도스왑 프리미엄)이 0.2265%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최고치의 30분의 1 수준이니 안심해도 된다는 논리이기도 합니다. CDS 프리미엄이란 해당 국가가 채무를 갚지 못할 위험에 대비하는 보험 비용으로, 이 수치가 낮을수록 국가 신용도가 높다는 의미입니다(출처: 한국은행).
하지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국가 부도 위험이 낮다는 것과, 시민들이 체감하는 고환율의 고통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500원대 환율은 원유·곡물 등 수입 원자재 가격을 직접 끌어올려 서민들의 장바구니 물가 부담으로 되돌아옵니다. 달러 자산을 보유한 투자자나 수출 대기업은 환차익으로 이익을 보지만, 내수 시장에 의존하는 중소기업과 일반 가계는 그 비용을 고스란히 떠안는 구조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 주식 포트폴리오의 달러 자산을 당분간 환전하지 않고 유지하기로 한 것도 이런 구조 때문입니다. 환율이 쉽게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다, 반도체 외 산업 다변화 없이는 자본 유출 구조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은행이 하반기 기준금리를 올려 한미 금리 차를 줄이면 원화 가치가 일부 회복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구조적 원화 약세를 되돌리기는 어렵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시각입니다.
1,500원대 환율이 일시적 현상으로 끝날지, 아니면 새로운 기준선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제 환율이 수출 실적 하나로 설명되는 지표가 아니라, 자본 흐름과 금리, 투기 세력의 베팅까지 얽힌 복합 지표가 됐다는 점입니다. 달러 자산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포트폴리오 안에서 통화 분산을 점검해 볼 시점이고, 이미 달러를 보유 중이라면 성급한 환전보다는 흐름을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 현명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금융·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참고: https://dig.mk.co.kr/Digging/Digging.html?id=9868&sort=desc&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