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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퇴근길에 우편함을 열었다가 묵직한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습니다. 선거공보물이었습니다. 코팅된 아트지들이 쏟아지는 걸 보는 순간, 제 머릿속엔 딱 하나의 생각만 들었습니다. '이걸 이제 어떻게 버리지?'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배달된 종이 선거공보물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습니다. 수천억 원의 세금과 환경 비용, 그리고 대부분이 버려진다는 현실이 맞물리면서입니다.
선거공보물 논란: 봉투째 버리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는 현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올해 2~3월 선거권이 있는 국민 682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종이 공보물을 '대충 훑어본다'는 응답이 52.2%에 달했고, '봉투째 버린다'와 '읽지 않는다'는 응답을 합치면 36.3%나 됐습니다. 자세히 읽어본다는 사람은 10명 중 1명 수준에 불과했습니다(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저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봉투를 뜯어봤는데, 후보자 얼굴이 번쩍이는 두꺼운 아트지들이 잔뜩 쏟아져 나왔습니다. 디지털 부업을 기획하면서 모든 기획서와 문서를 태블릿의 PDF 파일로만 처리하는 저로서는, 스마트폰 화면 몇 번만 터치해도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서 후보자의 전과 기록부터 재산 내역까지 다 확인할 수 있는 세상에 왜 이런 방식이 반복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공보물을 뜯지 않는 이유로는 'TV 등으로 이미 알고 있다'는 응답이 55.7%로 가장 많았습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즉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보를 스스로 선별하고 소화하는 능력이 높아진 현대 유권자에게, 종이 공보물은 이미 정보 전달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잃어버린 셈입니다.
세금낭비, 숫자로 보면 더 심각하다
발송 비용만 따져도 매 선거마다 320억~370억 원의 세금이 투입됩니다. 제작비를 포함하면 그 규모는 훨씬 더 커집니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는 공보물이 5억 8000만 부나 발행됐는데, 이 수치가 처음 눈에 들어왔을 때 저는 잠시 숫자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5억 8000만 부. 우리나라 인구가 약 5100만 명임을 감안하면, 국민 한 명당 열 장이 넘는 종이가 뿌려진 셈입니다.
여기서 ROI(투자 대비 효과)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ROI란 투입한 비용 대비 실제로 얼마나 효과를 거뒀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열 명 중 한 명만 제대로 읽는다면, 나머지 아홉 명에게 배달된 공보물의 ROI는 사실상 0에 가깝습니다. 민간 기업이었다면 즉시 중단했을 마케팅 방식을 국가 예산으로 매 선거마다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정 효율성 측면에서 지적할 부분도 있습니다. 현행 선거공보물 시스템은 유니버설 디스트리뷰션(universal distribution), 즉 수신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가구에 일괄 배포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쉽게 말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가정의 우편함에 무조건 꽂아두는 구조입니다. 이 방식이 설계된 시대에는 합리적이었을지 몰라도, 2026년 현재의 미디어 환경과는 명백히 맞지 않습니다.
환경오염, 재활용도 안 되는 코팅 종이의 문제
제가 30대 중반이 되면서 제로 웨이스트(Zero-Waste) 가사 시스템 구축에 꽤나 집착하게 됐습니다. 택배 상자 하나도 바로 분해해 압착하고, 비닐 코팅된 종이는 칼로 일일이 저며내어 분리 배출하는 것이 저의 취미 아닌 취미입니다. 그런데 선거공보물 봉투를 열었을 때 쏟아진 두꺼운 아트지들 앞에서 저는 잠시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거공보물에 쓰이는 아트지는 대부분 UV 코팅 또는 라미네이팅(laminating) 처리가 된 종이입니다. 라미네이팅이란 종이 표면에 얇은 합성수지 필름을 열과 압력으로 접착하는 처리 방식으로, 광택과 내구성을 높이는 대신 종이와 플라스틱이 물리적으로 결합되어 일반 재활용이 불가능해집니다. 결국 대부분이 일반폐기물, 즉 종량제 봉투로 처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2022년 지방선거 당시 공보물·투표용지·벽보 등 선거 인쇄물에 사용된 종이만 1만 2853톤에 달했습니다. 종이 1톤을 생산하는 데 30년 된 나무 17그루가 필요하다는 점을 대입하면, 그 선거 하나로 30년 된 나무 21만 그루 이상이 사라진 셈입니다(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 손으로 직접 가위로 코팅 종이를 잘게 쪼개며 종량제 봉투에 쑤셔 넣던 그 저녁, 이 숫자가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디지털전환과 옵트인, 어떤 방식이 현실적인가
이 지점에서 의견이 갈립니다. 디지털 공보물로 전환해야 한다는 쪽과, 고령층 등 디지털 취약계층의 알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쪽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저는 두 의견 모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 접점을 잘못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거론되는 현실적인 개선 방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옵트인(Opt-in) 방식 전환: 종이 공보물 수령을 원하는 유권자가 직접 신청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미신청자에게는 디지털 공보물을 기본으로 제공한다. 옵트인이란 사전에 동의한 사람에게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배달 앱에서 일회용품을 원하는 사람만 받도록 바뀐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 디지털 공보 시범 도입: 젊은 층 비율이 높은 도시부터 전자공보(e-공보) 시스템을 시범 운영해 효과를 검증한다. 전자공보란 종이 대신 공식 웹사이트나 앱을 통해 후보자 정보를 제공하는 디지털 형태의 선거공보물입니다.
- 재질 법제화: 불가피하게 종이 공보물을 발행할 경우, 재활용이 가능한 무코팅 용지 사용을 의무화하도록 관련 법령을 정비한다.
- 취약계층 접근성 보완: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접근이 어려운 고령층을 위해 주민센터·경로당 등에 공보물 비치 및 열람 서비스를 운영한다.
고령층의 정보 소외를 우려하는 시각도 충분히 타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 국민에게 읽히지도 않는 코팅 종이를 해마다 수억 부씩 배달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디지털 접근성 격차(digital divide), 즉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의 차이를 해소하는 방향은 종이를 무한정 뿌리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후보자 정보를 검색할 수 있도록 공공 디지털 인프라와 UI/UX(사용자 인터페이스/경험)를 개선하는 데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정보를 원하는 사람은 이미 스마트폰이든 TV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찾아봅니다. 반면 정보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아무리 종이를 배달해도, 그 봉투는 결국 뜯기지 않은 채 쓰레기통으로 향할 뿐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로 보입니다. 옵트인 방식 전환은 당장 내일도 설계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다음 선거부터라도 공보물 수령을 원하는 유권자가 신청하는 구조로 바뀐다면, 수백억 원의 세금과 수십만 그루의 나무를 아낄 수 있습니다. 제 정돈된 일상에 날아든 코팅 종이 폭탄을 가위로 쪼개던 그 저녁, 이 간단한 변화가 왜 이렇게 늦어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