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꼭 6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임신중지 의약품 '미프진'은 국내에서 정식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기획·재무 부서 신입사원으로서 국내 헬스케어 규제 정책 변동 추이를 분석하던 중 이 사실을 다시 마주쳤을 때, 솔직히 마우스를 쥔 손이 멈칫했습니다. 6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인데,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비공식 경로를 전전했을까 싶어서요.

미프진 도입: 6년 입법 공백, 무슨 일이 있었나
2019년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헌법불합치란, 해당 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나지만 즉시 무효화하면 법적 공백이 생기므로 입법부가 일정 기간 내에 대체 법안을 마련하도록 하는 결정 방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이 법은 위헌이니, 국회가 새로운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선고입니다.
문제는 그 '일정 기간'이 이미 훌쩍 지났는데 대체 입법이 감감무소식이라는 점입니다. 국회가 임신 허용 주수, 허용 사유 등 핵심 쟁점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임신중지 문제 전체가 제도권 바깥에 놓이게 됐습니다. 저는 사내에서 규제 리스크 분석 보고서를 들여다보면서, 법적 공백이 단순히 '아직 결정이 안 됐다'는 행정 지연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의 건강과 안전에 구멍을 내는 구조적 결함임을 실감했습니다.
지난 14일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이 문제를 직접 언급하며 관련 부처에 해결 방안 마련을 지시했습니다. 입법 논의가 지연되는 동안 당장 약이 필요한 여성들이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임신 허용 주수를 법으로 일일이 정하는 대신, 의사의 재량과 양심에 맡기는 방식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했고요. 6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행정부 최고위에서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입니다.
안전망 없이 버텨온 여성들, 미프진이란 무엇인가
미프진의 성분명은 미페프리스톤(Mifepristone)입니다. 미페프리스톤이란 프로게스테론이라는 임신 유지 호르몬의 작용을 차단하여 임신을 중지시키는 경구용 의약품을 말합니다. 1988년 프랑스에서 처음 허용된 이후 현재 전 세계 80~100여 개국에서 합법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세계보건기구(WHO)는 2005년 이 약을 필수 의약품 목록에 등재했습니다(출처: WHO 필수의약품 목록). 개발된 지 40년 가까이 된 약이고, 임상 데이터도 충분히 쌓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정식 품목 허가가 없다 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해외 직구나 비공식 경로로 구입해 복용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품목 허가란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가 의약품의 성분, 효능, 안전성을 심사해 국내 유통과 처방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절차를 의미합니다. 이 절차 없이 유통되는 의약품은 성분 함량이나 보관 상태를 검증받지 못했기 때문에, 복용 후 이상 반응이 생겨도 의료 체계 안에서 제대로 된 사후 관리를 받기 어렵습니다.
제가 관련 보도를 읽으면서 가장 불편했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안전성이 국제적으로 검증된 의약품인데도, 국내에서는 합법적인 처방 루트가 없다는 이유로 오히려 더 위험한 방식으로 복용이 이뤄지고 있다는 역설 말입니다. 제도의 공백이 안전망을 허무는 게 아니라, 아예 안전망 자체를 없애버리는 셈이었습니다.
- 미페프리스톤(미프진 주성분): 임신 유지 호르몬을 차단해 임신을 중지시키는 경구 의약품
- 1988년 프랑스 허용 이후 현재 80~100여 개국에서 합법적 사용 중
- WHO 필수 의약품 등재(2005년): 안전성·유효성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상태
- 국내 미허가 상태: 해외 직구 등 비공식 경로로 유통되며 신체 사고 위험 노출
세 번의 허가 신청, 번번이 막힌 이유
국내에서 미프진 도입 논의가 처음 나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현대약품이 미프진의 독점 공급 계약을 맺고 '미프지미소'라는 이름으로 식약처에 품목 허가를 신청한 것만 세 번입니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1차 신청은 2021년 7월이었습니다.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처음으로 허가 문을 두드렸는데, 식약처의 자료 보완 요청을 받은 뒤 현대약품 스스로 신청을 취소했습니다. 2차는 2023년 3월로, 이번엔 식약처가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이 이뤄져야만 작성할 수 있는 허가 요건 자료가 있다"는 이유로 심사를 잠정 중지했습니다. 그리고 2024년 12월 3차 신청이 이뤄졌고,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제가 이 흐름을 정리하면서 느낀 것은, 식약처가 성평등부·보건복지부와의 부처 간 협의를 이유로 판단을 미루는 동안, 허가 신청이라는 행정 절차 자체가 정치적 쟁점의 방패막이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의약품 허가 심사란 원래 안전성과 유효성이라는 과학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절차입니다. 그런데 임신중지 문제에서는 그 기준보다 부처 간 눈치 보기와 입법 동향이 심사 결과를 좌우하는 구조가 굳어져버린 겁니다. 이건 솔직히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설계 오류였습니다.
건강권을 지키려면, 안전망부터 조립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도입 지시 이후 찬반 논의가 빠르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빨리 도입해야 한다는 쪽은 개발된 지 40년 가까이 된 의약품의 안전성 근거가 충분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도 같은 입장을 밝혔습니다. 반면, 대체 입법과 의료 관리 체계가 먼저 갖춰져야 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투약 전 초음파 검사, 투약 후 경과 관찰, 의사의 법적 책임 소재 정리 등이 선행되지 않으면 오히려 여성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두 입장 모두 각자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제가 실무 현장에서 체감한 리스크 관리의 논리로 보면, '도입이 먼저냐, 안전망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사실 잘못된 질문 설정일 수 있습니다. 두 가지를 병행하지 않으면, 어느 쪽 방향으로 가도 구멍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건강권이란 단순히 치료를 받을 권리만이 아니라, 안전한 의료 환경에서 정보를 바탕으로 선택할 권리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임신중지 안전 처방 가이드라인과 투약 후 경과 관찰 연동망 같은 실질적인 하드웨어가 함께 조립되지 않는다면, 도입 자체가 오히려 새로운 사각지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도입이냐 아니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도입 시점에 맞춰 안전망을 동시에 구축하겠다는 구체적인 로드맵입니다. 그 로드맵이 나오지 않는 한, 이번 대통령 지시도 또 하나의 서류 이벤트로 끝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미프진 지금 국내에서 구할 수 있나요?
A. 현재 국내에서는 정식 품목 허가가 없기 때문에 합법적인 처방·구입이 불가능합니다. 일부에서 해외 직구나 비공식 경로로 유통되고 있지만, 성분과 보관 상태를 검증받지 않은 의약품이라 복용 시 신체 사고 위험이 있습니다. 정식 허가 전까지는 반드시 의사 상담을 먼저 받으시길 권합니다.
Q. 낙태죄가 없어졌다고 들었는데 왜 아직도 제도권 밖인가요?
A.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이는 국회가 대체 입법을 마련하도록 유예기간을 준 것입니다. 이후 6년이 지나도록 국회에서 합의된 대체 법안이 만들어지지 않아, 임신중지 자체가 허용도 금지도 아닌 모호한 법적 공백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 결과 의약품 허가 심사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Q. 이번 대통령 지시로 미프진이 곧 허가될 가능성이 있나요?
A. 가능성은 열렸지만, 속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식약처가 성평등부·보건복지부 등 관계 부처와 협의 중이며, 입법 공백 문제와 의료 안전망 구축이 함께 논의돼야 허가 심사가 실질적으로 진전될 수 있습니다. 과거 세 차례 신청이 모두 결론을 내지 못한 전례가 있는 만큼, 이번에는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뒤따르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Q. 미프진 도입을 반대하는 측의 주된 이유는 뭔가요?
A. 반대 측에서는 안전망 없는 성급한 도입을 우려합니다. 투약 전 초음파 검사 의무화, 투약 후 경과 관찰 체계, 의료 사고 발생 시 의사 개인에게 책임이 집중되지 않도록 하는 처방 기준 등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도입 자체를 반대한다기보다 순서와 준비를 강조하는 시각으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결론
6년이라는 시간은 길었고, 그 사이 피해는 고스란히 제도 바깥으로 밀려난 여성들의 몫이었습니다. 이번 대통령 지시를 계기로 미프진 도입 논의가 다시 불붙은 것은 분명 의미 있는 변화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에도 결론이 나려면 도입 논의와 안전망 구축이 동시에, 그리고 구체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봅니다. 선언적 지시 한 줄이 아니라, 임신중지 안전 처방 가이드라인과 경과 관찰 연동망이라는 실질적인 하드웨어가 함께 설계될 때 비로소 여성들의 건강권이 실질적으로 보호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식약처와 보건복지부의 후속 움직임, 그리고 국회에서 대체 입법 논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계속 주시해볼 것을 권합니다. 이 문제는 정치적 이슈이기 이전에, 지금 이 순간에도 선택이 필요한 여성들의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