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도쿄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습니다. 한국에서 쓰던 카드를 그냥 갖다 댔더니 '삐빅' 소리 한 번에 문이 열렸거든요. 파스모 카드 어디서 사는지, 얼마 충전해야 하는지 전혀 몰라도 됐습니다. 그 순간 '이게 바로 오픈루프구나' 싶었고, 동시에 '한국은 왜 아직도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뒤따라왔습니다.
카드 한 장으로 도쿄 지하철을 탔다 — 오픈루프와 EMV 컨택리스 이야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2026년 3월, 도쿄를 포함한 관동 지역 주요 철도 사업자 11곳, 54개 노선에 오픈루프가 전면 개시됐다는 소식을 미리 읽긴 했는데, 막상 직접 써보니 편리함의 체감 온도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픈루프(Open-loop)란 별도의 교통 전용 카드 없이 평소 쓰던 신용카드나 스마트폰을 단말기에 한 번 탭하면 자동으로 요금이 빠져나가는 결제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편의점에서 카드를 갖다 대듯 그 동작 하나로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방식은 2012년 런던 지하철에서 처음 도입됐고, 이후 뉴욕·홍콩·싱가포르·마닐라·베이징 등 전 세계 주요 도시로 빠르게 번졌습니다(출처: Visa 공식 블로그).
이 오픈루프 결제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기술이 바로 EMV 컨택리스입니다. EMV 컨택리스란 Europay·Mastercard·Visa 세 기관이 공동으로 만든 국제 표준 비접촉 결제 방식으로, 카드 안에 내장된 NFC 칩이 단말기와 통신하여 결제를 처리합니다. 한국 카드에 교통카드 칩이 따로 박혀 있는 것과 달리, EMV 컨택리스는 글로벌 결제 네트워크를 그대로 활용하기 때문에 나라마다 별도 인프라를 새로 깔 필요가 없습니다. 이 차이가 '국내 카드로 해외 지하철을 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정말 단순하고 빠릅니다. 카드를 개찰구 리더기에 0.5초쯤 대면 바로 통과입니다. 예전에 파스모나 스이카에 현금을 넣으려고 환전기와 충전기 사이를 오가던 기억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특히 동전이 생기는 게 싫어서 현금을 최대한 안 챙기는 저한테는 이 변화가 단순한 편의 개선이 아니라 여행 방식 자체를 바꾸는 수준이었습니다.
현재 오픈루프를 이용할 수 있는 대표 도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일본 (도쿄·오사카 등 전국 주요 노선)
- 뉴욕 (MTA 지하철·버스)
- 런던 (언더그라운드 전 노선)
- 홍콩 (MTR)
- 싱가포르 (MRT·버스)
비자 카드 한 장이 지갑에 있다면, 위 도시에서는 교통카드 걱정 없이 바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IT 강국의 민낯 — 한국 오픈루프가 느린 이유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한국은 IT 강국이니까 당연히 오픈루프도 됐겠지" 하고 처음 알아볼 때 생각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제주도 시내버스를 제외하면 국내 대중교통에서 EMV 컨택리스 결제는 아직 불가능합니다.
이유는 구조적입니다. 국내 버스와 지하철은 대부분 페이온(PayOn)이라는 국내 전용 결제 규격으로 운영됩니다. 페이온이란 한국 교통 시스템에서만 통용되는 독자적인 비접촉 결제 표준으로, 글로벌 EMV 컨택리스 네트워크와는 별개로 작동합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이 규격이 자리를 잡았고, 이후 수십 년간 인프라가 쌓이다 보니 지금 와서 바꾸려면 단말기 교체, 정산 시스템 재구축, 수많은 이해관계자 조율이 한꺼번에 필요합니다.
그 결과,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지금도 공항에 내리자마자 편의점을 찾아 티머니 카드를 구매하고 현금으로 충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K-컬처로 전 세계 관광객을 불러들이면서 정작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첫 이동부터 장벽을 세우는 셈입니다. 제가 직접 일본에서 느낀 그 편리함을 생각하면, 한국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이 느낄 불편함이 더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그래도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2025년 8월 제주도 시내버스에 국내 최초로 오픈루프가 도입됐고, 서울시는 2030년을 목표로 3단계 전환 계획을 수립했으며, 부산은 2028년 목표입니다(출처: 한국스마트카드). 다만 런던이 2012년에 이미 시작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2030년 목표'라는 타임라인은 글로벌 속도로 보면 꽤 느린 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상황이 단순한 기술 지연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지연에 가깝다고 봅니다. 이미 해외 도입 사례와 기술 표준이 갖춰진 상태에서, 비용과 이해관계를 이유로 전환을 미루는 것은 결국 관광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스마트 시티를 내세우면서 가장 기초적인 대중교통 결제 단계에서 '갈라파고스화'가 진행 중이라는 비판은 쉽게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당장 해외여행 계획이 있다면, 지갑 속 비자 카드에 컨택리스 기능이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카드 뒷면이나 앞면에 무선 주파수 모양의 심볼이 있으면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 도쿄, 오사카, 런던, 뉴욕 어디를 가든 교통카드 구입 없이 첫 발걸음부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한국도 언젠가는 그 편리함을 외국인 방문객에게 그대로 돌려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날이 2028년이든 2030년이든, 적어도 목표한 기한은 지켜지길 바랍니다. 우리가 해외에서 당연하게 누리는 그 '탭 한 번'을, 한국을 찾는 사람들도 당연하게 쓸 수 있도록 말입니다.